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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살아내고 말하고 저항하는 몸들의 인류학>, 김관욱 | 충격적인 '체념증후군'

BOOK[책이야기]/Nonfiction[비문학]

by 꿈치9 2025. 2. 5.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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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온 '로고스'적 사고는 이성을 우선시한다. 몸은 천시하고 머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조는 근대까지 쭉 이어졌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시대에 문관과 무관 중 문관이 득세를 하던 때가 꽤나 오래갔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천대받던 몸은 새로운 주체로 부상했다. 이성중심주의는 수많은 비인간적 전쟁을 겪으면서 해체되고 몸을 단순한 수동적인 개체로 보는 시선이 조금씩 변화했다. 특히 페미니즘 이론가 주디스 버틀라는 젠더가 '수행적'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우리 몸은 단순한 생물학적 기반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개인이 자신의 몸을 통해 정체성을 표현하기도 하고 신체를 변형하고, 재구성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책은 흥미로운 여러 담론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사회적 문제들에 귀기울이는 목소리 인문학을 차용해 우리 몸을 분석한다. 사실 처음에 책을 읽고 여성 저자인줄 알았다가 남성 저자인 것을 알고 놀랍기도 했다. 저자 이력도 특이하다. 의과대학 졸업 후에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진료를 시작했지만, 30대 중반에 때려치고 인류학자길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의료와 인문학의 결합이라. 

"페이어는 과학의 꽃이라고 불리는 의학이 엄밀하게 의학 교과서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마다 공유되는 '관례'를 따른다는 점을 지적한다. (중략)새로운 치료법 도입에서도 미국 의사들은 그 치료법이 실질적으로 '해롭다'라는 사실이 입증되기 전까지 치료를 계속하는 반면, 영국 의사는 반대로 실질적으로 '이롭다'는 사실이 입증될 때까지 치료 적용을 늦춘다고 한다."

 

 

2.

 

책에서 가장 놀라웠던 부분 중 하나는 '체념증후군'이다.  몇년전부터 스웨덴에 거주하는 다수의 난민 아동들에게 이상한 증상이 생겼다. 갑자기 먹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 않고 마치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길게는 수년간 잠에 빠져드는 증상이다. 

 

이 부분이 충격적이라 B랑 같이 이를 다룬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체념증후군의 기록'을 봤다. 다큐멘터리에는 세 가정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모두 본국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고 겨우 탈출한 난민 가정이다. 작고 소중한 아이들이 천사처럼 잠에 빠지는 모습. 부모들은 아이가 욕창 등에 걸리지 않을까, 자고 있는 아이를 억지로 세워 마사지 하고 다리를 움직여준다. 그래도 반응이 없는 아이들. 

공통점은 모두 난민 심사를 거절당하거나 거주 유예를 받았다는 것이다. 조그만 아이들이 생명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 스스로 스위치를 내려 꿈속으로 떠난다.

 

놀랍게도 난민 허가를 받고 이 사실을 알려주자 아이들이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한다. 1년 넘게 잠들었던 아이들까지. 

희망이 살아나자 삶도 살아나는 것일까. 

 

가깝게는 중국에서는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탕핑족' 청년들이 크게 늘고 있다. 심지어 이같은 청년을 위한 양로원도 속속 생긴다고 하는데, 인기라고 한다. 먹고 살기 어려운 취업 환경 속에서 소극적 저항을 택하는 아이들, 청년들. 희망을 잃어버린 우리 몸의 반란이다. 

"나는 이 사례를 통해 이성이 아니라 몸 자체가 주체적으로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주인공일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하게 됐다. 즉, 이성에 지배받는 몸이 아니라 그 이성을 비웃듯 몸이 불가사의한 현상으로 인류에게 오히려 질문을 던진 것이다. (중략) 이번에는 몸을 마음보다 앞선 존재로 주목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몸이 발명해낸 증상에 대해 사회가 더욱 진지하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몸 하나에만 의지하며 안전지대를 만들기에는 너무나 위태로운 세상이 돼 버렸다."

 

"메를로퐁티는 '신체'의 지향성을 새로이 주창한다. 그는 몸이 마치 세상과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돼 지향성을 지닌다고 말하며, 몸 자체는 그래서 '살아 있는 의미들의 총체'라고 표현한다.(중략) 모두가 자라는 동안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불꽃을 경험하며 쉼 없이 각자의 필체를, 몸틀을 형성해 가고 있다."

 

 

3.

 

최근에 B와 함께 본 막장(?)드라마 '내 남편과 결혼해줘'에서 남편과 친한 친구에게 배신 받은 주인공은 암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남편에 의해 사망한다. 이후 2013년으로 돌아가 제2의 삶을 살게 된 주인공. 일어날 일은 일어나지만, 이미 미래의 상황을 알게 된 주인공은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고 애쓴다. 

 

그가 암에 걸린 이유는 '화병' 때문이다.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잘못된 사람을 만나 얻었던 화병. 

주인공이 행복을 조금씩 찾아가자 그 병은 다른 직장동료에게 간다. 그 역시 잘못된 사람을 만나 화병을 얻었던 것. 화병이 드라마에서는 암으로 발현됐지만, 사실상 불행한 삶을 사는 것에 대한 방증인 화병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몸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보여준다. 전태일은 자신의 몸을 불질러 우리나라 노동의 역사를 바꾸기도 했다. 

보여지는 것보다 우리 몸은 생각보다 우리 문화와 사회의 다양한 면을 반영한다. 다만, 고정된 몸이 아니라 움직이는 몸이다.

몸은 나의 소유가 아니라 몸 자체가 바로 나일 수 있고, 집이 될 수 있다.

 

본인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사회 문제로 넓혀가는 서사가 어렵지 않고 쉽게 펼쳐져 더 읽기 좋았다. 

"클레어는 몸이 차가운 돌로만 채워지는 수동적 공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욕망한 것을 위해 따뜻한 몸의 체온으로 무언가를 데울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을 자신이 살아온 삶의 역사를 통해 입증해 보였다. (중략) 무엇을 지향하는 몸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집으로서의 몸에 대한 믿음, 자긍심이야말로 아픔이 창살처럼 우뚝 솟아 있는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의 출발점일 수 있다. 몸에 집이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은 일종의 제약이자 동시에 가능성과도 같은 것이다."

 

"결국 몸은 곧 드라마이며, 드라마여야만 하며, 드라마로 상상되어야 한다. 그 어떤 몸도 그들만의 드라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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